석유왕, 대부호, 완전장악과 독점의 키워드로 “록펠러”라는 이름은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에게도 익숙하다.
록펠러와 스탠다드 오일
1. 내연기관 자동차로의 전환기에 부를 쌓은 사업가 : 존 D. 록펠러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거다.
왜 내연기관 자동차가 주도권을 차지했었을까?
전기자동차가 아닌 내연기관 자동차가 시장의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헨리 포드와 록펠러의 직접적인 만남이나 협력은 없었다지만, 록펠러의 주유소 보급과 맞물리지 않았다면 헨리 포드의 모델 T가 그렇게 많이 팔려나갈 수 없었고, 내연기관 자동차가 시장의 주도권을 쥐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부의 대부분은 석유 산업에서 나왔다. 록펠러는 1870년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Standard Oil Company)를 설립하여 석유 정제, 운송, 마케팅의 거의 모든 측면을 독점했다. 그의 회사는 당시 미국의 석유 산업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석유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탠다드 오일의 성공은 록펠러의 철저한 사업 전략 덕분이었다. 그는 경쟁사들을 흡수하거나 도산시키는 방법으로 석유 산업을 독점했고, 이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창출했다. 록펠러의 독점적 지위는 그가 정유소뿐만 아니라 철도, 파이프라인, 주유소 등 석유 관련 모든 산업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2. 스탠다드 오일의 주유소 전략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은 20세기 초에 미국 전역에 수많은 주유소를 열었다.
1911년 미국 대법원의 반독점법 판결로 인해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되기 전까지, 이 회사는 미국 내 거의 모든 주유소를 소유하거나 지배하고 있었다.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은 약 1,000개 이상의 주유소를 운영하며 당시 미국 자동차 산업의 주된 연료 공급원이었다. 스탠다드 오일의 주유소 전략은 내연기관 자동차의 보급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헨리 포드(Henry Ford)가 1908년에 모델 T를 출시했지만 자동차가 대중화 될 수 있었던 건,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전국적으로 신속히 확장된 스탠다드 오일 주유소가 없었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3. 내연기관의 득세와 전기자동차의 몰락
전기자동차가 초기 내연기관 자동차에 비해 득세하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석유 산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존 D. 록펠러가 세운 스탠다드 오일의 영향력이 컸다.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 주유소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휘발유를 대량으로 공급함에 따라, 미국에서는 휘발유가 가장 보편적인 연료로 자리잡았다. 전기자동차는 초기에는 유망했지만, 주유소 인프라와 휘발유 공급망의 확장으로 인해 내연기관 자동차에 밀리게 되었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주유 속도가 빠르고, 주행거리가 길다는 점에서 전기자동차보다 우위를 점했고, 이는 특히 당시의 충전 인프라가 부족했던 전기자동차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내연기관 자동차가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고, 전기자동차는 한동안 잊혀진 존재로 남게 되었다. 시장을 지배하지 못한 전기자동차에 대한 연구개발은 당연히 축소되고 위축되어 잊혀졌다.
4. 독과점과 인수합병을 통한 완전장악과 부의 극대화 추구
록펠러의 선구안과 의지는 칭찬받을만 하지만, 록펠러와 스탠다드 오일의 역사상 유래없는 성공은 ‘독점‘이 시장의 주도권을 잡는데 얼마나 유용한 무기인지, 그리고 시장의 주도권이 선택되면 기술력의 우위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기도 한다.
1911년 대법원의 반독점 판결로 스탠다드 오일이 여러 개의 회사로 분할되기 전까지, 록펠러는 미국 내 거의 모든 주유소를 소유하거나 지배했고, 그의 주유소 전략은 내연기관 자동차의 성공은 물론 오늘날의 록펠러 가문을 있게 했다. 록펠러는 생전에 스스로를 ‘자비의 천사’라고 부르며, 효율성이 부족한 회사들을 흡수했다고 자평했지만, 그의 성장 방식은 독과점이었다. 무자비한 가격경쟁을 상대를 몰아낸 후 인수하는 식으로 한 산업군의 수직계열화를 추구했다.
록펠러 가문은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로, 많은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특히 존 D. 록펠러는 자신의 부를 활용해 대규모 자선 활동을 펼쳤고, 록펠러 재단을 설립해 교육, 과학, 예술 등의 분야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록펠러의 손자인 넬슨 록펠러는 뉴욕 주지사와 제41대 미국 부통령을 지냈으며, 존 D. 록펠러 3세는 아시아 사회에서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록펠러 가문은 항상 긍정적인 평가만을 받지는 않았다. 독점적인 비즈니스 관행과 과도한 부의 축적은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록펠러 가문과 관련된 여러 스캔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펠러 가문은 여전히 미국의 역사와 경제에 큰 영향과 발자취를 남긴 가문으로 기억되고 있다.